[기자수첩] ‘소확행’과 ‘빈지워킹(Binge-Working), 그리고 ’모모 세대(Mo-Mo Generation)’
[기자수첩] ‘소확행’과 ‘빈지워킹(Binge-Working), 그리고 ’모모 세대(Mo-Mo Generation)’
  • 박경준 기자
  • 승인 2018.06.04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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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트리뷴=박경준 기자] 한때 드라마 한류 붐이 전 세계적으로 일면서 '빈지워칭'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빈지워칭(Binge-Watching)은 폭음, 폭식이라는 뜻의 '빈지(Binge)'와 본다는 뜻의 '워칭(Watching)'을 합쳐 만든 신조어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원하는 프로그램을 한 번에 몰아 보는 것을 말한다.
 
초창기에는 외국으로 유학을 간 유학생들이 향수에 젖어 모국의 드라마를 보고자 할 때, 인터넷 속도 때문에 한참을 내려받아야 한 편의 드라마를 구할 수 있었던 현실에서 여러 명이 모여 각자 따로 한 편씩을 구해 모이는 것에서 시작했다.
 
서로 약속한 한 편의 드라마를 가지고 모이면 전체 하나의 시리즈물이 완성됐고, 그것을 주말 등을 이용해 한 곳에 모여서 음식을 시켜놓고 화장실 시간까지 조정해 가면서 함께 드라마 몰아보기를 하면, 모국의 드라마 시리즈를 한 번에 다 볼 수 있었다.
 
그것이 이제는 유학생을 넘어 대중적인 유행으로 번졌다. 평소에 일하느라 혹은 다른 일정으로 시간을 맞추기 어려워 본방사수가 어려웠던 드라마, 예능 등 미디어 콘텐츠를 내가 원하는 시간에 몰아서 볼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다. 물론 이런 빈지워칭을 즐기는 문화가 대세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스마트폰 등 모바일 기술의 발전 덕분이다.

 

이처럼 기술의 눈부신 발달은 많은 사회적 풍경을 바꿔놨다. 드라마 '모래시계'를 보기 위해 퇴근 후 귀가를 서둘렀다는 말은 벌써 한참 전에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TV로 방영 시간에 맞춰 드라마를 시청하는 사람은 이제 고령자 세대다. 젊은 사람들은 이제 더는 드라마, 예능 등 콘텐츠의 본방 시간을 기다리지 않고, 인터넷을 통해 내가 원하는 시간에 시청한다.
 
그보다 조금 더 어린 친구들은 아예 검색을 할 때조차도 구글, 네이버, 다음 등 웹에 따로 접속하지 않는다. 포털을 거치지 않고 바로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에서 바로 검색한다. 인터넷 서핑을 하면서 웹조차도 거치지 않으려는 이 세대를 조금 더 모바일로 다가간(More Mobile) 세대라고 해서 '모모 세대(Mo-Mo Generation)'라고 부른다.

 

  
빈지워칭 문화는 이런 모모 세대를 만나면서 그 범위를 더 크게 확산했다. 소위 '빈지-'를 접두어로 하는 '빈지 문화(Culture)'를 만들어 내면서, '빈지워칭', '빈지리딩', '빈지게이밍' 등 많은 신조어가 생겨났다. 그만큼 단 시간에 무언가를 몰아서 하려는 습관의 사람들이 생겼다.
 
해외에서는 영상 콘텐츠 판매 기업인 넷플릭스가 이러한 새로운 문화를 간파해 건당 결제 방식을 과감히 버리고 시리즈 단위 콘텐츠 결제 방식을 발 빠르게 도입해 큰 성공을 얻었다. 뒤늦게 아마존도 부랴부랴 경쟁에 뛰어들었다.
 
한편 국내에서도 한 콘텐츠 기업이 빈지워칭을 워칭(Watching)과 마라톤(Marathon)을 합쳐 '와차톤(Watchathon)'이라고 명명하면서 이런 새로운 문화를 적용한 콘텐츠 사업에 뛰어들기도 했다.
 
이와 같은 '빈지 문화'는 사실 '폭식'이라는 뜻에서도 알 수 있듯 건강에는 큰 도움이 안 된다는 지적을 받지만, 지금의 현실에서는 크게 확산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바로 '소확행'의 열망 때문이다. '소확행'은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뜻으로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랑겔한스섬의 오후'라는 에세이에서 처음 사용한 말이다. 얼마 전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는 2018년 우리 사회 10대 소비 트렌드 중 하나로 이 단어를 꼽았다.

이들이 뜻하는 '소확행'의 예로는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는 것, 서랍 안의 속옷을 반듯하게 접어 가지런히 쌓는 것, 겨울밤에 부스럭 소리를 내며 이불 속으로 들어오는 고양이의 소리와 감촉을 듣고 느끼기 등 매우 사소하고 소박한 것들이다. 하지만 이 소소한 행복조차 쉽게 누릴 수 없는 지금 우리 사회의 현실이 소소한 것에서라도 그나마 작은 행복을 찾아 마음껏 누리겠다는 문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저녁이 있는 삶',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 등이 없는 지금의 안타까운 현실이 '소확행'을 만들어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주말인데도 억지로 나가야 하는 직장 상사와의 등산-레저, 산적한 업무로 평일 내내 야근을 하다 정작 주말은 부족한 밀린 잠으로 날려버리는 현실, 심지어 주말인데도 회사에 나가 근무를 해야 하는 휴식을 빼앗긴 삶…, 이 안타까운 노동 현장의 모습이 만들어낸 것이 바로 '소확행' 트렌드다.
 
이런 가운데 빈지 문화는 이제 '빈지워킹(Binge-Working)'으로까지 발전하고 있다. 일을 몰아해서라도 짧은 여유 시간을 만들어, 내 삶의 균형을 위한 복지를 정당하게 누리겠다는 것이다. 다만 빈지워킹이 가능하려면, 짧은 시간에 주어진 일을 모두 처리해야 하는 높은 효율성이 필요하다. 모모 세대를 중심으로 확산하는 이러한 빈지워킹 문화는 기술의 발전으로 스마트 워크, 재택근무, 온라인 협업 등이 일상화된 현실을 바탕으로 한다.
 
그 형태는 다양하다. 일본에서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노마드잡'으로 불리는 일을 하면서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경제적인 보상으로만 지내는 문화를 발전시켰다. 국내에서도 최저임금이 오를수록, 알바를 통해 생활을 하면서 빈지워킹을 실현하는 젊은이들이 조금 더 확산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 의미와 탄생의 배경은 조금씩 다르지만, 해외에도 프랑스의 '오캄(Au Calme)', 스웨덴의 '라곰(Lagom)', 덴마크의 '휘게(Hygge)' 등 삶의 소소한 행복을 찾는 문화가 대세로 떠오르고 있다.
 
이처럼 일터에서조차 내 삶의 행복을 방해하는 슬픈 현실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의 노력이 추가로 필요한 현실에서, 새롭게 탄생한 '소확행'과 '빈지워킹'의 문화가 오히려 우리 사회 전반에 '저녁과 주말이 있는 삶', '일과 삶의 균형'을 찾을 수 있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박경준기자 pkj@ktribun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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