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권의 문화·예술 돋보기] AI(인공지능) 시대에서도 '인간 본성'은 영원한가
[김희권의 문화·예술 돋보기] AI(인공지능) 시대에서도 '인간 본성'은 영원한가
  • 김희권 문화예술학 박사
  • 승인 2019.02.21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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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으로 살펴보는 영화 〈알리타〉 속 '인간 본성' 탐색
▲ 상영중인 영화 〈알리타: 배틀 엔젤〉의 포스터.   (출처: CGV 홈페이지)
▲ 영화 〈알리타: 배틀 엔젤〉의 포스터. (출처: CGV 홈페이지)

 

[코리아트리뷴] AI(인공지능) 시대에서도 '인간의 본성'은 영원할 것인가? 고대 철학자들이 영원한 숙제로 삼아 평생을 고민했던 이런 '인간 본성'에 관한 화두를 그대로 영화 속 세계관에 녹여낸 작품이 있다. 바로 지난 설 개봉 이후 줄곧 국내 박스오피스 2위를 차지하고 있는 영화〈알리타: 배틀 엔젤〉이다. 영화는 사이보그(AI)와 인간이 공존하는 26세기 세상을 그리고 있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기술과 문명이 발달한 미래의 세상을 묘사하고 있지만,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본성은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단지 '인간 본성'만을 놓고 보면, 지금은 물론이고 수천년 전과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다.

 

영화 속 세상은 모두가 갈망하는 '공중도시(자렘)'와 그 도시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고철도시'로 나뉜다. 고철도시 주민들은 자렘을 위해 일하지만, 아무나 자렘에 갈 수 없도록 법으로 금지돼 있다. 기본적으로 자렘에서 태어난 사람은 자렘에 살 수 있지만, 특별한 사유가 있는 경우 추방되기도 한다. 주인공 알리타를 돌봐주는 이도와 시렌도 그들의 딸이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자렘에서 쫓겨난 사례다.


소위 '가진 자'들은 사회 지배계층을 형성해 자신들만의 혈통을 보존하려 하고, 피지배층을 억압하며 그들을 노예처럼 부린다.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를 배격하고, 정권을 잡은 독재자는 지배구조를 더 공고히 하기 위한 정책을 시행하며 철저한 1인 독재체제를 유지하려 한다. 심지어 그 좋은 자리를 차지했으니 천년만년 누리기 위해 독재자는 불로장생을 꿈꾼다. 또 가진 자들은 주거지역을 구분해 자신들만의 안락한 공간을 독립적으로 꾸려 실컷 누리고자 한다. 철저한 계급이 존재하는 세계다.

 

이는 모두 영화 속 설정이지만, 어째서인지 당장 우리 현실과 견줘봐도 그리 낯설지 않다. 얼마 전 종영한 '스카이 캐슬'도 소위 가진 자들만의 공간에서 펼쳐진 그들만의 세상 속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가 아니었던가. 이처럼 인간이 있는 곳은 결국, 그것이 어디든 한참 뒤의 미래라도 결국 비슷한 것일까? 

 

인간에게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고자 하는 본성이 있다.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을 세웠던 진시황은 불로장생의 염원을 품고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고대 이집트에서는 사망한 사람의 부활을 준비하며 시체를 미라로 만들었다. 그 무덤 안에는 온갖 생필품을 같이 넣었다. 현대 사회에서도 인공장기를 만드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영생불사의 꿈을 실현하려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현대 사회의 도시 내에서 고소득층과 저소득층의 주거지역이 분리되는 현상을 ‘주거분리’라고 한다. 고소득층의 주거지역과 저소득층의 주거지역은 인접하지 않으며, 그 사이에 경계지역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도시공간구조에 관한 여러 이론(버제스의 동심원이론, 호이트의 선형이론, 해리스와 울만의 다핵심이론 등)에서 명확히 나타난다. 이론에 따르면 저급주택지구는 출퇴근 시간과 비용을 줄이기 위해 중심업무지구(CBD) 근처에 형성되고, 출퇴근 시 자가용을 이용하고 넓은 면적의 주거형태를 선호하는 고급주택지구는 교외로 이동한다. 이러한 이론이 대체로 미국 도시의 현상을 연구했다는 한계는 있지만, 소위 '가진 자'들의 주거 욕구를 잘 드러낸다는 점에서 모든 사회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 2019년 초반, 큰 인기를 얻은 드라마 '스카이캐슬'.   (출처: JTBC 홈페이지)
▲ 큰 인기를 얻은 드라마 '스카이캐슬'. (출처: JTBC 홈페이지)

 

고대 철학자들은 이와 같은 인간의 본성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플라톤은 그의 저서 《국가》를 통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통치자·군인·생산자 계급으로 나뉜다고 주장했다. 이상적인 국가는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아야 하며, 지혜로운 통치자 계급이 국가 전체를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화에서는 절대 권력자로 등장하는 '노바'와 그의 측근들이 통치자 계급에 해당할 것이다. 또 고철도시의 질서를 유지하는 '헌터 워리어'를 군인으로, '고철도시 주민'은 생산자 계급으로 볼 수 있다.

 

계급은 현실에서도 영화 속에서도 무너뜨리기 쉽지 않다. 지배계층은 비슷한 계층끼리 혼맥으로 얽어 자신들의 계급과 부를 혈통으로 보전하려는 경향이 있다. 플라톤은 '국가적인 악(惡)'의 원인을 '사유(私有) 재산'으로 보고, 국가의 통치자(수호자)가 재산 공유제와 처자 공유제를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고로 훌륭한 남녀가 가장 건강한 연령대에 자녀를 많이 낳도록 해 통치자 집단을 유지하고, 열등한 남녀는 최대한 자녀를 낳지 못하게 해 그 자녀 혹은 불구로 태어난 아이를 은밀한 장소에 몰래 감춰버리자고 주장했다. 우수한 혈통만을 보존해 통치자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또 플라톤은 통치자 양성을 위한 엘리트 교육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통치자가 될 자질과 잠재성이 있는 아이들만 공교육 혜택을 받도록 하고, 상공인과 농부 등은 국가에 잘 복종시키기 위한 정도만 교육 시키자고 주장했다.

 

고대 철학자들은 대체로 노예제를 긍정했다. 플라톤은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도 《정치학》에서 재류외인이나 노예 등은 시민에 포함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며, 억압하는 자와 억압 받는 자가 항상 존재하고 서로 대립하는 속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영화는 소득 구분에 의한 사회적 계급화와 그로인한 약탈적 차별을 확연하게 보여준다. 고철도시 주민들이 각종 물자를 생산해 자렘으로 올려 보내면, 자렘에서는 고철도시로 쓰레기를 버린다. 결국 계급·지역적으로 차별 당하는 고철도시 주민들은 자렘 주민들의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며, 정치적으로는 노바에게 늘 감시당하는 생활을 한다. 고철도시 내부도 약육강식의 무자비한 세상으로 그려진다. 그러한 세상을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라고 표현했던가. 

 

영화 속 절대권력자 노바는 강력한 힘으로 고철도시를 통제하는데, 헌터 워리어를 통해 적당한 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는 구조다. 다만 평화를 위한 자연법의 제시나 사회계약을 통한 통치권 수립의 단계로 나아가지는 못한다. 이처럼 강력한 정치력을 가진 노바, 그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과연 노바는 정당하게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일까? 

 

플라톤은 '국가 최대의 악'이란 구성원들이 각자의 본성에 따른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지 않고, 다른 일에 간섭하거나 서로의 역할을 바꾸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국가공동체를 마치 주인이 노예를 지배하듯 통치하는 1인 지배체제의 정체(政體)를 '참주 정체'라 했다. 영화 속 노바는 바로 그 참주에 해당한다. 공자는 《논어》에서 임금이 임금다워야 한다고 했다. 고대 철학자들이 가장 경계했던 참주의 전형인 노바의 모습에서, 새삼 군주가 욕심와 이기심을 벗어나 제대로 군주답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느낄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사회의 악은 인간의 못됨(악덕)에서 초래하며, 이 못됨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한다고 했다. 그래서 악을 제거하기 위해 법과 교육에 의한 품성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르면 뛰어난 군주는 지도자답게 그러한 것을 깨달아 구성원이 악에 빠지지 않도록 충분한 교육을 제공해 품성을 다듬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정치적 계급의 정점에 있는 노바와 같은 존재가 가장 큰 악이라는 점이다.

 

▲ 영화 〈엘리시움〉에서도 지구를 떠나 새로운 유토피아를 세운 인간들이 지구에 남은 사람들을 착취하며 살아가는 '계급적 약탈 식민지' 구조의 미래 세계관을 보여준 바 있다.   (출처: 영화 〈엘리시움〉의 한 장면)
▲ 영화 〈엘리시움〉에서도 지구를 떠나 새로운 유토피아를 세운 인간들이 지구에 남은 사람들을 착취하며 살아가는 '계급적 약탈 식민지' 구조의 미래 세계관을 보여준 바 있다. (출처: 영화 〈엘리시움〉의 한 장면)

 

그렇다면 노바는 자기 통치권의 근거를 무엇이라고 생각했을까? 영화에서는 지도자 노바의 힘이 워낙 강력해 벡터나 그루위시카 등 노바의 심복들은 죽는 순간까지 노바에게 충성을 다했다. 누구도 감히 맞설 수 없는 강력한 힘을 가진 노바에게 사실상 이런 질문은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다만 영원하지 않다는 권력의 속성과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고,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는 영국 정치가 액튼 경의 명언을 떠올리면, 교훈 삼기 위해서라도 지배자 권력의 속성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인간은 두려워하는 자에 대해 처벌이라는 공포를 의식하므로 그 대상을 결코 외면할 수 없다고 했다. 로크도 《통치론》에서 절대권력자가 하는 일에 감히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모두 그의 검에 침묵하게 될 것이라고 기술한 바 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영화에서는 노바에게 더는 협력하지 않겠다고 용기 있게 선언한 시렌이 결국 뇌와 눈동자가 분해돼 노바에게 전리품으로 바쳐지는 신세가 됐다. 노바의 통치권은 이처럼 '공포 정치'에 근거하는가.

 

영화에서는 고철도시를 지배하기 위한 갖가지 거짓말이 동원된다. 100만 크레딧을 내면 자렘에 보내준다는 약속, 알리타를 모터볼 선발전에 출전시키면 자렘에 보내준다는 약속, 물자용 튜브에 사람은 탈 수 없다는 규칙 등이다. 알리타와 파트너 주인공 휴고는 이에 관해 의문을 품는다. 그렇다면 노바의 통치권은 '정치적 속임수(공약 空約)'에 근거하는가. 통치를 위해서라면 거짓말도 용인될 수 있는가.

 

플라톤의 《국가》에서 소크라테스는 치자들이 피치자들의 이익을 위한 거짓말을 남발하고 속임수를 써야 할 것이라고 했다. 마키아벨리도 《군주론》에서 군주가 신의가 두텁다거나 겉과 속이 같다는 등의 기질을 갖추고 있으면 오히려 해롭다면서, 단지 이런 기질을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주장했다. 국가의 통치를 위해 필요하다는 명목으로 거짓말까지 용인하려는 모습이 영화 속에서 새삼 검증하듯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인간의 속성인 듯하다.

 

이러한 까닭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사람의 지배보다 법의 지배가 낫다면서 법의 지배가 신과 이성의 지배라면, 사람의 지배는 야수적 요소라고 주장했다. 사실 영화 속 고철도시에도 법은 있다. 고철도시 주민들이 자렘에 갈 수 없다거나, 총과 같은 무기를 소지할 수 없다는 규칙 등이 그것이다. 매우 불평등한 규칙이지만, 노바는 이처럼 법 제도의 형식을 빌려 고철도시를 지배하고 있었다. 다만 이는 국민의 대표자들이 모인 의회에서 제정한 것이 아니므로 결국 노바의 지배력은 근거가 없는 권력일 뿐이다. 그래서 노바는 단지 '참주'에 불과하다.

 

국가 구성에 관한 현대적 이론인 사회계약론에 따르더라도 노바는 사회계약을 위반한 것이므로, 국민이 계약을 파기하고 노바를 해임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는 영화 속 제도권 세상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와 같은 경우 마지막 방법으로 로크가 《통치론》에 기술한 것처럼 '오로지 하늘에 호소하는 방법' 뿐인데, 그마저도 고철도시 주민들이 저항권을 행사하기에는 도저히 힘의 균형이 맞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노바에게 실력 행사가 가능한 유일한 존재, 알리타가 악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겠다며 그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한다. 언뜻 무모해 보이지만, 그만큼 사면초가 상황에서 나온 극단적이고 처절한 피지배자 대표의 절규인 셈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정의'란 사람들로 하여금 옳은 일을 하게 하고, 옳은 태도로 행동하게 하며, 옳은 것을 원하게 하는 성품이라고 했다. 플라톤이 구상한 이상국가는 바로 그러한 '정의'가 실현되는 국가였다. 교육을 잘 받아 전문적인 자질을 갖춘 철인(哲人)이 이성적으로 통치하는 국가, 지혜의 덕을 갖추고 절도가 있는 신(神)과 같은 '철인'이 선(善)의 이데아를 품고 진리에 입각해 국가를 통치해야 한다는 빈틈없이 완벽한 구상. 어쩌면 인간의 단점을 보완해 완벽할 수 있는 사이보그가 지배하는 미래의 세상을 그린 영화 〈알리타〉는 과연 뛰어난 인공지능의 구성원이 넘쳐난다면, 그러한 완벽한 세상·이상적인 정치를 실현할 수 있는지 묻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결론적으로는 이러한 '정의' 개념에 비춰 노바는 이미 통치자로서 실격이다.

 

▲ 〈알리타: 배틀 엔젤〉은 사이보그가 인류와 공존하는 미래 세계를 그린 영화다. (출처: CGV 홈페이지)
▲ 〈알리타: 배틀 엔젤〉은 사이보그가 인류와 공존하는 미래 세계를 그린 영화다. (출처: CGV 홈페이지)

 

한편, 영화에서는 인간 본성의 순수한 면도 보여주려고 한다. 알리타가 휴고에게 본인 힘의 원천인 심장을 꺼내 보여주며 "이것조차 줄 수 있다"고 말하는 장면, 그런 알리타를 휴고가 사랑하게 되면서 사이보그 부품을 잘라 내다 파는 일을 그만 두는 장면, 이와 같은 알리타와 휴고의 진실한 사랑에 감동한 시렌이 노바의 명령을 거부하는 장면 등이 나온다. 오래 전 맹자는 "사람의 본성이 착한 것은 마치 물이 아래쪽으로 흘러가는 것과 같다"면서 "혹여 나쁜 짓을 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외부의 힘에 의한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인간 본성의 선함은 권선징악의 결과를 위한 단순한 장치라기보다는 맹자의 성선설에 가까운 세계관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지금부터 약 20~30년 후에는 인공지능(AI)이 인류의 모든 지식을 초월하는 능력을 갖게 될 것이라 한다. 그들이 자가증식하며 사는 세상은 어떤 본성이 지배할 것인가. 인간처럼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고, 거짓말과 권모술수를 동원해서라도 권력을 공고히 하려 할까? 아니면 인류의 역사를 모두 학습한 그들이 인간과 다른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나갈까? 두려운 한편, 흥미롭게 지켜볼 일이다.

 

김희권 문화예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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