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리셋 증후군과 고졸 성공시대
[기자수첩] 리셋 증후군과 고졸 성공시대
  • 박경준 전문기자
  • 승인 2013.02.20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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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pixabay)
▲ 대학교 졸업식. 사진=pixabay

 

[코리아트리뷴 박경준 기자] 소위 '고졸 성공시대'가 열렸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한다.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보다 더 어려워 대학 졸업을 미루다 보니, 청년들은 취업준비 경력을 쌓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10년씩 대학을 다니고도 모자라 스펙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대학원 학력마저 필수 조건이 됐다는 그야말로 암울한 시절이다.

 

전 세계적으로 심각한 청년 실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국 정부는 투자를 통해 일자리를 늘리려 동분서주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정부가 고등학교만 졸업하고도 대학 졸업생들조차 들어가기 어렵다는 번듯한 직장에 취업할 수 있도록 해준다니, 그야말로 솔깃하지 않을 수 없는 이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독일의 마이스터고를 벤치마킹한 직업학교가 첫해 졸업생을 배출했다. 그것을 계기로 연일 방송에서는 고졸 성공시대가 열렸다며 홍보 중이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강력하게 추진하는 이러한 '고졸 신화 만들기 프로젝트'를 마냥 긍정적으로만 바라만 볼 일인지 고민해야 한다.

 

정부가 방송 등 미디어를 통해 연신 자랑하듯 홍보하는 '고졸 성공시대'는 어쩌면 취업 문제에서 아무런 해결책도 될 수 없는지 모른다. 실업문제는 사실상 한 자리를 두고 여러 사람이 경쟁하는 제로섬 게임이다. 고졸자가 성공시대를 열어간다지만, 그 자리를 원했던 나머지 사람은 실업자로 남는다. 부족한 일자리에 누구를 앉히느냐 하는 공정의 문제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결국 정부가 주장하는 '고졸 성공 신화'는 지금까지의 일자리 정책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새로운 형태의 일자리를 만들어 고졸자를 취업시키는 것이 아니라면, A가 들어갈 자리에 B를 대신 들여보내는 돌려막기식 조삼모사다. 따라서 방송을 통해 연신 자랑하듯 홍보하는 '고졸 성공시대'는 어쩌면 취업 문제에서 아무런 해결책도 될 수 없는지 모른다.

 

그런 관점에서는 '고졸 성공시대'라는 말도 조금 이상하다. 고졸자가 성공시대를 여는 것이라면, 상대적으로 일자리를 빼앗긴 대졸자에게는 '실패시대'인 것인가? 정규직으로 취업해 정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양질의 일자리가 아니라면, 고졸자에게도 결국 임시방편일 뿐 궁극적으로 좋은 일자리 정책은 아니다. 그렇다고 부족한 일자리를 두고 취업 경쟁을 하기 위해 스펙을 쌓고 대학을 졸업한 대졸자에게 만족스러운 정책은 더더욱 아니다. 도대체 이 정책이 어떤 관점에서 만든 누구에게 좋은 정책인지 궁금하다. 물론 대졸자 연봉보다 고졸자 연봉이 조금 더 적으니 그것만 놓고 보면, 고용주 입장에서는 인건비를 줄일 수 있는 정책일 수 있겠다.

 

고졸자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은 고졸자에게 기회를 줘야한다는 얘기는 이미 지금까지 계속 있었다. 다만 고졸자 취업이 가능한 분야가 주로 단순 노무 등에 치중한 일자리였고, 그마저도 양질의 일자리로 전환하지 못하는 단기간 일자리인 경우가 많다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그러니 일자리가 부족해 취업난이 가중할수록 그러한 일자리마저 대졸자와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서 고졸자가 상대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 엄밀히 말해 고졸과 대졸로 나눠 성공시대를 구분지을 문제는 아닌 것이다. 오히려 정부는 고졸자와 대졸자로 나눌 것이 아니라 그들 모두를 하나의 취업하고 싶은 '구직자' 집단으로 보고, 부족한 일자리를 늘리는 데 더 집중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슬프게도 고졸 성공신화를 위한 새로운 일자리 창출이 가능하다는 말 또한 허구에 가깝다.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인건비가 싼 곳을 찾아 떠나갔던 공장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려고 온갖 애를 쓰고 있는 미국의 오바마 정부만 봐도 알 수 있다. 차라리 미국처럼 기존의 많은 일자리를 되찾아 오는 것이 새로운 일자리를 만드는 것보다 몇 배는 더 쉬운 일일지도 모른다. 4차 산업혁명으로 기존의 일자리마저 위협받는 상황에서 우리나라만 유독 갑작스럽게 고졸 성공신화를 위한 새로운 일자리가 쏟아져 나온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고자 고민하고 노력하는 정부의 노력을 깎아내리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다만 그 대책을 왜 하필 고졸 성공신화 만들기에서 찾게 됐는지 한 번쯤 짚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부족한 일자리 현실에서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위치에 서고자 충실히 대학을 마치고 취업 준비에 많은 노력을 하는 대졸자에게는 정부의 갑작스럽고 일방적인 이러한 정책이 상대적인 박탈감으로 다가올 수 있다. 학력 과잉 세태와 점점 고령화하는 첫 취업연령은 사회적 실패이지 절대로 대졸자 개개인의 무능력이나 실패가 아니다. 그런데도 정부의 기조에 발맞춰 첫 취업연령이 고령화한 통계 등을 특별히 강조하며 학력 과잉을 얘기하는 다수 언론의 보도는 마치 그것이 큰 잘못이거나 실패인양 받아들여지는 그릇된 사회적 분위기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

 

또 심화하는 대졸자 실업난이 바람직하지 못하다면, 오히려 정부 차원에서 더 늦기 전에 그들을 구제해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구제방편의 고민 하나 없이 대졸자는 숫제 버리고 가겠다는 것은 구멍 뚫린 정책일 뿐이다. 혹시라도 골치 아픈 대졸자 취업률을 고민하다 쉽지 않으니 차라리 고졸자부터 구제하면 어떨까 하는 식의 발상이 아니었기를 바랄 뿐이다. 대졸자도 결국 같은 취업시장에서 고졸자와 경쟁하고 취업한다. 그러므로 고졸 성공시대를 논하고 싶다면, 그와 동시에 지금까지의 정책의 흐름을 따랐던 대졸자에게도 마땅히 출구전략을 함께 제시했야만 한다. 고졸 성공시대를 논하기 전에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해 취업을 준비중인 그들도 성공시대를 맛볼 자격이 충분하지 않을까?

 

'리셋 증후군(Reset Syndrome)'이란 버튼 한 번 눌러서 컴퓨터를 재부팅(초기화)시키듯 현실세계에서도 맘에 들지 않거나 실수한 부분이 있으면 얼마든지 다시 리셋이 가능할 것으로 착각하는 사회적 병리 현상을 말한다. '고졸 성공신화' 또한 가만히 보고 있자면, 대졸자 취업난으로부터 시작되는 일자리 문제를 손쉽게 한방에 리셋 시켜버리고 싶은 당국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다. 엉켜있는 실타래를 풀기 위해 공들여 한 오라기씩 풀어가는 대신에 그 문제가 어렵고 복잡하다고 느껴지는 순간 버튼 한 번으로 컴퓨터를 재부팅하듯 골치 아픈 대졸자 문제는 버리고 고졸자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는 식이다.

 

하지만 고졸자보다 더 많은 대졸자의 취업은 절대로 쉽게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상대적으로 고연령인 대졸자는 취업 타이밍을 한 번 놓치면 신입으로 입사 하기가 점점 더 어렵다. 또 작금의 현실에서 취업이 선행돼야 결혼이 가능하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이다. 몇 번의 휴학을 거치거나 국방의 의무를 다 하고 난 뒤 혼인 적령기에 취업을 준비하는 대졸자에게는 취업이 바로 혼인의 필수조건으로 이어진다. 한편에서는 젊은이들의 만혼이 늘고, 혼인률이 급격히 줄어든다는 우려 속에 적극적으로 결혼을 권장하는 정부의 정책을 두고 모순을 느끼게 하는 지점이다.

 

우리나라의 인재정책과 취업문제는 5년마다 바뀌는 정부 정책에 따라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새로운 정책과 대안 모색이 꼭 필요하지만, 문제는 역시 '책임감'이다. 기존의 정책을 믿고 따라온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는 보완 대책을 마련하면서 새로운 정책을 고민하고 실행해야 한다. 전 정부의 책임이라며 당국이 외면하고 내 자식은 아직 어리니 마이스터고 보내면 된다는 식으로 우리 사회가 대졸자를 내친다면, 이미 취업난 속에서 'N포 세대'로 궁지에 몰린 그들을 정말 버리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박경준 전문기자 pkj@ktribune.co.kr